요즘 경계하는 단어: "성장"

"너는 A인 사람이니까, 당연히 X를 해야지"

사람의 정체성에 근거해서 그 사람이 해야 할 행동을 판단하는 건 보통 우스꽝스러운 일입니다. 마치 "너는 한국인이니까 당연히 김치를 좋아해야지" 같은 말이죠.

그런데 요즘 이 바닥에서는 A의 자리에 "성장하는 개발자"를 집어넣는데 거리낌이 없습니다. 특히 "너는"보다 "나는"으로 시작하는 문장을 자주 접하고 있어요. 가령 "나는 성장하는 개발자니까, 매일 퇴근하고 사이드 프로젝트를 진행하겠어" 같은 말을요.

지금 내가 붙들고 있는 사이드 프로젝트가 정말로 성장에 도움이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심지어 예전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지금은 아닐 수도 있고요. 그러나 사이드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는 결론이 내 "정체성"에서 나온 것이라면, 상황에 맞는 유연한 수정이 어렵습니다. 정체성에 기반한 판단이 위험한 이유입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성장을 정체성으로 삼는 것부터 오류라고 생각합니다. 성장을 지향한다는 게 누군가의 태도이고 자세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정체성일 수는 없어요. 가령, 몸이나 마음이 소진되어 오랫동안 휴식을 취하는 일이 정체성의 위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활동이건 나에게 정말로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 차분하게 판단하려면,  "너는 성장하는 개발자인데, 어서 시작하지 않고 뭐해?"를 기저에 깐 수많은 광고 앞에서 불안감을 느끼지 않으려면, 겉보기로는 그저 바람직하고 건설적일 뿐인 "성장"이라는 단어에 의도적인 경계를 심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