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너리즘
이 모든건 언제 시작되었을까요. 언젠가부터 "새로운 것"에 대한 흥미가 사라졌습니다.
이건 사회적인 현상이기도 합니다. 언젠가부터 신축 아파트는 예전처럼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공사 과정에서 철근을 빼먹었을지 모르는 잠재적 하자투성이에요. 언젠가부터 새로이 개업한 헬스클럽엔 선뜻 큰 돈을 선불로 결제하기 어렵습니다. 몇 년이고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오래된 헬스클럽이 더 믿음직합니다.
위 사례를 생각해보자면, 저, 그리고 제 주변 사람과 사회가 겪는 매너리즘을 떠받치는 두 개의 큰 기둥은 다음과 같습니다.
- 기존에 작동하던 오래된 무언가도 이미 충분히 좋습니다.
- 구태여 새로운 무언가를 시도해보는데 드는 비용과 위험성을 감당하기 싫습니다.
저는 위 두 가지를 매일 느낍니다.
- 새로운 친구를 사귀어 나가기 싫습니다. 오래 알고 지내던 사람이 좋아요. 아니, 지금 유지되고 있는 관계라는 것도 잠깐 사이에 어떻게 잘못될지 모른다는 일말의 불안감 또한 있습니다.
- 세상에 무슨 게임이 더 출시되건 간에 예전부터 하던 게임 다시 켜보는게 낫습니다. 뻔히 다 해봤고 기억에도 남아있는 챕터를 플레이하다가 곧 꺼버리는게 다반사지만요.
- 새로운 세대의 CPU가 출시된다거나, 새로운 전자기기가 출시된다거나 하는 것에 도통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요즘 나오는 제품들이 그렇게까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사용중인 기기들과 작은 리눅스 박스로 충분합니다.
- 결정적으로 저를 고민에 빠뜨리는 지점은, 직업의 세계에서 제가 점유하고 있는 위치에 충분히 만족하여, 여기서 더 나아간 무언가를 추구하기 위한 행동을 할 의지를 상실했습니다.
지금 당장의 위치로 충분히 좋아보입니다.
세상 어딘가에는 눈부시게 발달하고 있는 분야가 있을거고, 제가 몸담은 클라우드 컴퓨팅이나 인공지능도 그에 포함됩니다. 자원과 능력이 되는 일군의 사람들이 여기에 열정을 다 하고 있습니다. 그걸 보면서 생각하는 것은 있지만, 느끼는 것은 없습니다.
저는 제가 잘 못 하던 것을 잘하게 되는 시기(explore)와, 이미 잘 하는 것을 최대한 활용하여 주변에 충분히 기여하는 시기(exploit)를 번갈아가며 겪어왔고 지금은 원래의 전략대로라면 있는 시간 없는 시간을 짜내어 탐사(explore)를 할 시기입니다. 지금 잘 못 하는 것을 잘 하게 되었을 때, 이게 장기적으로 얼마나 큰 보상으로 되돌아올지 잘 압니다. 그런데 잘 안 됩니다.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기 위해 회사를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매너리즘을 피할 수 없는 것을 보면, 바꿔야 하는건 내 주변의 환경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바꿔야 하는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단순한 우울인지, 최근의 크고 작은 사고의 영향인건지, 거대한 사회적 경향에 같이 휩쓸린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배가 부른건지도 모릅니다. 또래집단과 비교하자면 잘 먹고 잘 사는 축에 속하는 것이 맞으니까요.
바로 그 또래들에게 뭔가 돕고 베풀만한 배포 역시 함께 사라졌습니다. 어떻게든 내 미래가 지금보다 밝으니 이 정도 베푸는 건 괜찮다라는 호탕함보다는, 당장 손에 쥐고 있는 재화에 대해 계산기를 더 열심히 때리는 자기 자신의 경향성을 발견하게 되어요.
그래서 슬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