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상태에 대한 이성적인 설명"이 불가능할 때가 있습니다

석사 졸업하고 기업을 고를 때, 연구 위주의 포지션을 아예 선택지에서 제외하면서 "석사 2년 해보니 나랑 연구는 안 맞는 것 같아요."라는 말을 하는 경우를 흔히 봐요.

신기한 건 평범하고 무난하게 석사를 끝마친 사람들, 평소에 "나랑 연구랑 안 맞아" 같은 불만을 입에 담지 않던 사람들이, 갑자기 차후 진로를 고민하기 시작하면 "나랑 연구는 안 맞아요" 같은 소리를 한다는 거예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흔히 말하는 "개발")도 똑같아요. 평소 코딩에 미쳐 살던 사람들이 이쪽으로 일자리 구할 때 "저랑 개발 안 맞는 것 같아요" 같은 이상한 소리를 하기 시작해요. 왜 이러는 것인가 하면, 자기 "정체성"이랑 자기 "상태"를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2년 동안, 평생 하지 않았던 논문 읽기를 하고, 뭔가 세상에 없던 걸 만들어 내려고 하고, 실험 결과를 내려고 낑낑대고, 그 와중에 연구비니, 조교 일이니 하면서 시간이 빨려갔다면, 졸업할 때쯤 연구라는 걸 하기 싫은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상황이에요. (그 사람이 연구를 하는 근본적인 정체성과 역량은 훼손되지 않았어요.)

코딩도 마찬가지. 이걸 본격적으로 자기 일로 삼겠다고 코딩 테스트 연습하고 포트폴리오 준비하면 그렇게 좋은 코딩이 싫어지는 상태에 도달하는 건 자연스러워요. 그걸 두고 "저랑 개발 안 맞는 것 같아요" 같은 소리를 할 필요도 없고요.

이런 일은 더 근본적으로는 "내 상태에 대한 이성적인 설명"을 하려고 하니까 발생해요. 내 상태라는 건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나빠졌다가, 아무 이유 없이 좋아지다가 하기도 해요. 내 몸 상태가 별로거나, 기기 상태가 별로거나, 어려운 일에 집중적으로 많이 시간을 쏟았을 때 안 좋아질 수도 있고요.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어떤 날은 이유 없이 개발하기 싫어질 수 있어요. 그래서 그게 누군가의 정체성 위기가 되어야 하느냐면, 그렇지 않아요.